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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 회고록 - 일대기 편 본문
회고를 남기기에 앞서
2023년 한 해 동안 서울대학교 인액터스 산하 프로젝트 '시(視)공간' 팀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 올해에 이 글을 남기는 순간까지 알럼나이로서, 대표로서, 친구로서 시공간에서의 여정을 제 나름대로 이어왔습니다. 어느 순간 이제 정말 팀을 떠날 때가 왔음을 알았고, 늘 그래왔듯 회고 글로써 이번 여정의 마침표를 찍으려 합니다.
'일대기 편'에서는 제가 프로젝트에 지원하게 된 계기부터 시공간 활동을 마무리하기까지, 장장 20개월간 시공간과 함께한 여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물 흐르듯 기록하였습니다. 시공간이 성장해 온 길,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 그리고 사건들. 그들의 중심에서, 때론 먼발치에서 바라봐온 모습들을 최대한 생생히, 내부자의 시선에서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추후 업로드될 '시각장애인과 소셜벤처 편'에서는 보다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에서 '시공간'이 과연 어떤 단체인지, 어떤 사람들을 만나며 어떤 가치를 좇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려 합니다. 시공간의 정신을 등에 업고 소셜벤처의 대표로서 짧게나마 마주했던 국내 시각장애인 실정에 대해 개인적으로 느껴왔던 여러 단상과 소회도 남길 예정입니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제 개인적인 관점에서 서술된 글로, 사실과 다르거나 임의로 각색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본문 속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과도하게 추측하는 행위는 삼가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프로젝트에 합류할 때부터 이 회고록이 무사히 작성되기까지, 한결같이 저를 품어준 시공간과 팀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블로그 주인 드림.
0. 전주 (前奏)
- 보이지 않는 자들
고등학교 3년간 한 달에 한 번 꼴로 귀가하는 기숙 생활을 하며 말 그대로 폐관 수련을 거쳤던 내게 갑자기 주어진 성인의 시야와 자유는 적응키 어려운 것이었다. 도전이 겁났고, 내디딜 발걸음의 방향이 틀릴까 두려워 이도 저도 아닌, 방황의 새내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 한심하던 내가 얕게나마 앞길을 찾기 시작하게 된 계기가 크게 세 개 있다.
굴레 | 여름방학 때 친구의 소개로 영재학교 진학을 희망하는 강남 학군지 중학생의 과외를 잠시 봐준 적이 있었다. 붙임성 좋은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가 매번 반겨 나름 재밌게 하던 과외였는데, 정말 아닌 밤중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액의 사교육비를 들여 영재학교를 거쳐 서울대에 합격한 내가, 다시 고액의 과외비를 받아 가며 이 학생을 가르치는 굴레에서 철저히 소외되는 이들은 대체 누가 손을 뻗어주는 것인가. 곧장 봉사 단체에 가입하여 6개월간 교육봉사를 했지만 되려 더 많은 고민만 남기게 되었다.
메아리 | 대학 입학 후 큰 단체에서 일해보고 싶단 막연한 동기로 총학생회에서 활동했다. 내가 속한 인권안전국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학내 장애 학생간담회 참석이었는데, 동석하기로 한 선배가 급작스레 불참하여 뭣 모르던 새내기가 얼떨결에 총학생회 대표 격으로 있게 되었다. 어찌저찌 간담회가 끝나고 회의 내내 조금 딱딱한 인상을 남겼던 장애인 남학우가 갑자기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다가왔다. 논의되었던 한 안건에 대해 학생회가 움직여줄 것을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돌변한 학우의 태도와 그 어색함에서 묻어나는 간절함을 채 헤아리기도 전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단 중 말단이었던 나는 후에 그 사안이 진전을 찾을는지 알 방법조차 없었고, 덮친 격으로 내부 사정으로 인해 총학생회 기능이 일찍 정지하게 되면서 내가 버선발로 뛰며 이끌던 장애 인권 증진 프로젝트 또한 중단되었다. 그렇게 남겨진 장애인 학우들의 목소리는 이따금 한편에 맴도는 메아리가 되었다.
글 | 신입생 필수 이수 과목인 '대학 글쓰기' 강의에서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글이 있었다. 관련해 과제가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글을 읽었던 그날 밤 나는 분명히 전율했다. 모 신문사 전 편집장이 과거 청년 빈곤 문제에 대해 기고한 글인데, '보이지 않는 빈곤 담론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빈자들이 마주한 현실을 섬세한 통찰로 꿰뚫어 보았다. 2년간의 현장 취재가 녹아들어 간 글, 그다지 긴 분량이 아님에도 문단 하나하나가 주는 메시지는 무거웠다. 그동안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한국 사회에서 소외가 가지는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후로 내가 절대 잊지 않는 한 가지 배움이 있다. (가난한 청년은 왜 눈에 보이지 않는가)
진짜 소외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누군가 부단히 찾아내야 비로소 그 흔(痕)이 보인다.
- 나도 그들처럼
대학교 2학년, 코로나19가 덮쳤고 갓 개발을 배우던 난 친구의 소개로 성균관대 인액터스 소속 프로젝트 '소다란'의 외부 개발자로 참여하게 되었다(소다란 회고 편 참고). 인액터스는 '사회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한다는 비전을 가진 글로벌 학회로, 국내에도 서울대를 비롯한 다수의 학교에 지부가 있다. 대게 경영학회로 분류되는 탓에 국내엔 인문 사회계열 학회원들이 압도적인데, 이제껏 속해왔던 집단과 완전히 다른 온도와 색깔에 큰 호기심을 가졌었다. 소다란 팀원들은 과하다 싶을 만큼 일했고 무서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물론 그 온도에 감화된 나도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으나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이런 추진력을 얻을까 하는 물음표가 오래 떠다녔다. 그 답은 몇 번의 대면 미팅이 있고 난 뒤 가늠할 수 있었는데, 사회 문제를 해결하겠단 동기부여도 멋진 모범답안이 되겠으나 진정한 답은 결국 '사람'이었다. 서로를 200% 믿고 즐겁게 가족처럼 지내는 팀원들이 있기에 학업을 병행한 고된 활동도 버텨지는 것이었다. 이를 어깨너머로 지켜보았던 난 그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부러워했다.
나는 사람의 신의를 중시하면서도 결코 타인을 쉬이 신뢰하지 않는, 어떤 의미로 매정한 사람이었다. 대회에 팀을 꾸려 나가도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컸고, 이 책임을 함부로 남에게 넘기는 법이 없었다. 특히 고교 시절부터 그 많은 대회와 팀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도 믿음보단 불신과 실망의 경험이 흔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때부터 타인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데 겁이 나기 시작했는데, 내가 신뢰하고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일수록 더욱 그랬다. 타인에게 실망할 바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한탄하는 것이 훨씬 더 마음이 편했다.
소다란 활동을 마무리 지으며 작은 소망을 남겼다. 나도 언젠가 그들처럼 믿을 수 있는, 가족 같은 팀원들을 가질 것이라고. 그러나 내 주제에 분명 그러한 인연이 과분한 것임을 알았다.
- 선택
소다란 활동을 마무리 지은 그해 봄에 입대했다. 이듬해 가을에 전역하고 잠깐의 휴식 기간을 가지니 곧 연말이 되었다. 여러 개인 사정이 겹쳐 마음이 답답한 상태였고 나답잖게 홀로 국내 여행을 떠날 정도로 헛헛했다. 이대로 시간을 더 흘려보내긴 싫었고 어떤 것이든 좋으니 나를 한껏 쏟아내고 싶었다. 그러던 와중 우연히 인액터스 모집 공고를 보게 된 것이다.
머리로는 불가능하단 것을 알고 있었다. 복학 후 내 학년은 전공과목이 넘치는 3학년이었고 이 전공들은 절대 시험 기간에 잠깐 바짝 공부한다고 소화할 수 있는 과목들이 아니었다. 각종 실험과 과제는 주어진 학점 로드를 가볍게 뛰어넘고, 시험 기간이 아니어도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인액터스는 학회 중에서도 주 2회 대면 회의와 1년의 의무 활동 기간을 비롯해 학업을 병행함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인 로드를 자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다란을 가까이서 봐온 난 그 점을 더 잘 알았다.
이러한 현실이 있음에도 계속 이상으로 눈을 돌렸다. 학회의 일원이 되어 그들처럼 프로젝트를 이끄는 내 모습을 수시로 상상하곤 했던 것이다. 인액터스를 통해 '보이지 않는 자들'을 찾아 나설 수 있어서? 장애 학우들에게 못다 한 책임을 속죄할 수 있어서? 아니면 마침내 신뢰할 수 있는 가족 같은 팀원을 만날 수 있어서? 내가 진정 무엇을 바라 학회에 지원했는지에 대한 답을 학회를 활동하는 내내, 마친 지금까지도 곧잘 회고하지만 아직 명쾌한 하나의 답은 없다. 어쩌면 단순히 그냥 재밌어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양으로 홀로 떠난 여행에서 낮에는 눈밭을 걸으며 이 같은 고민을 했고, 밤에는 숙소에서 지원서를 끼적였다. 마침내 지원 마감일이 될 때까지도 마음은 쉽사리 안정되지 못했다. 이대로 지원서 제출을 포기할까 하는 갈림길에 서 있던 것이다. 그때 유튜브에서 우연히 최초 여성 LOL 프로게이머 '순당무'의 팀 입단 영상을 보게 되었는데, 이 문구가 타이밍 좋게 내게 꽂아 들었다.
- 실패는 용납되지만, 도전하지 않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날의 선택이 과연 겹겹이 쌓인 우연의 결과였는지, 새내기 시절부터 예정된 운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1. 산통
- 그저 좋은
당시 서울대학교 인액터스에는 네 개의 프로젝트가 존재했고 그중 세 개만이 리크루팅을 진행했다. 각 팀에서 소개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한 팀이 시각장애인과 정보접근성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막 시작하고 있었다. 아이디어는 솔직히 확 와닿지는 않았으나 일전에 참여했던 해커톤 프로젝트가 시/청각 장애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점, 그리고 마침 팀에서 해당 서비스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으로 구현할 개발 소요가 있단 점이 눈길을 끌었다. 아이디어가 단순한 만큼 다양한 방향으로 확장, 고도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팀의 모멘텀과 프로덕트 매니저(PM)의 수완이었다. 프로젝트 출범 2개월 만에 많은 것을 달성했고 PM은 훨씬 더 가파르고 높은 미래를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직감적으로 그 눈빛에 이끌렸고, 그렇게 기존 파운더 두 명에 나를 포함한 신입 세 명이 합류하여 시(視)공간 프로젝트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프로젝트 배정 후 곧바로 2주간 유럽 여행을 떠났다. 중학교 동창들과 약속한 전역 여행 일정인데, 학회 지원 당시 회장단의 허락을 구했다. 아침에 비대면으로 회의에 참여하고 낮에는 여행 일정을 소화하며 밤에는 개발과 태스크를 했다. 합류와 동시에 내게 주어진 특명은 하나였다. '시각장애인과 채팅할 수 있는 앱'을 만들어 출시하는 일이다. 그러나 거의 1년 만에 시도하는 개발이었기에 해외에서 작은 삼성 노트북 한 대로 개발이 썩 여의치는 않았다. 기억을 더듬으며 매일 밤을 새우고 iOS 빌드를 위해 처음으로 맥북까지 구매해 가며 앱 개발에 매진했다. 당시 우리 팀은 하루가 아까웠고, 유의미한 진전을 위해 이 MVP 테스트 용 앱이 절실했다. 내가 하루 쉬면 팀의 타임라인 전체가 하루 뒤로 밀리는 것과 같았다.
3월, 개발 시작 1달여 만에 마침내 진행된 MVP 테스트는 좋은 느낌으로 진행되었다. 테스터로 모집한 20여명의 시각장애인이 언제든 궁금한 사진과 질문을 앱을 통해 전송하면 해당 시간대 담당 팀원이 채팅으로 답장하는 업무였다. 시간대별로 인원을 분담하긴 했지만 결국 모두가 5분 대기조가 되어 채팅이 올라오면 앞다투어 답장을 보내는 형국이 되었다. 다운로드가 발생하고, 슬랙으로 연동된 질문 알림이 한둘씩 쌓이고, 서버에 로그가 찍히고 데이터베이스에 데이터가 쌓였다. 테스터 대화방에 수시로 올라오는 피드백과 반응, 앱 내 채팅으로 돌아오는 감사 인사는 그야말로 시공간이 드디어 이룩해낸 작지만 값진 첫 성과였다. 참 고되었지만 팀원 모두가 이토록 보람되고 즐거울 수 없었다. 그 순간이 그저 좋았다.
- 위로
나를 프로젝트에 받아들여 준 PM은 내게 귀인 그 자체였고 나 역시 충성을 다했지만 나와 곧잘 언쟁을 벌였다. 평소엔 팀원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적극 수용하던 PM이지만, 논의가 심화되고, 특히 나와 의견이 다를 때면 곧바로 평행 가도를 달리며 쉬이 좁혀지는 법이 없었다. PM과 난 성별, 전공, 취향부터 관심사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대척점에 서 있었지만, 성격적으로는 어떤 면에서 크게 닮아있었다. 논리, 근거와 별개로 각자의 직관에 대한 큰 자기 확신이 있었고, 각자의 도전을 지금껏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감각을 누그러뜨리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PM과 내가 팀 내 최연장자였고 (내가 한 살 어린), 덕분에 동생들이 진땀 흘릴 분위기를 곧잘 만들었다.
충돌의 발생 지점은 다양했지만 다른 팀원 간에도 첨예했던 논점이 있다. 무릇 소셜벤처라면 흔히 겪는 딜레마인데, 바로 수익성과 소셜 임팩트 간의 밸런스다. '사회문제를 비즈니스로서 해결한다'는 인액터스의 이 마법 같은 기조는 현실에서 그 롤 모델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소외계층, 약자가 중심에 오는 비즈니스는 태생적으로 그 근거와 논리가 부실할 수 밖에 없다. 멀리 갈 것 없이 국내에 시각장애인은 경증 약 20만명, 중증은 단 5만여명만이 존재하는데, 이 좁은 시장에서 정상적인 비즈니스가 성립할 리 만무하다. '시각장애인이 앱에 업로드한 사진을 해설해 주는 서비스'는 '무료'라는 전제하에 테스트 반응이 좋았지만, 역시 수익성을 고려하는 순간 등 돌릴 것이 뻔했다. 이런 모순적인 명제들 속에서 반듯하고 모두의 의견이 합치하는 비즈니스를 찾기란 우리에겐 더욱이 큰 난관이었다.
프로젝트 초기, 앞선 내용을 포함해 정말 많은 방향성 회의가 있었고 신명 나게 언쟁을 벌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면 항상 머리가 복잡했다. 집에 도착할 즈음이면 머리가 식고 생각이 정리되기 시작하는데, 십중팔구 내가 미숙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팀 내 유일한 공대생인 입장에서 다른 팀원들이 보지 못한 방향성과 기술적 인사이트를 제언할 책임 있었으나, 실제로는 부실한 아이디어와 근거를 들고 떼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부터 기술에 관한 공부와 확신이 부족하므로 진정 팀원들을 설득할 수 없었고, 의욕만 앞서 신뢰를 저버리는 상황이 반복되자 내가 팀에 남아있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회의까지도 들었다. 팀원들에게 항상 미안했고, 개인적으로 이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다.
당시 팀 내에 유일한 남자 동기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살 어림에도 누구보다 신의가 있고 올곧은 팀원이었다. 회의 때면 항상 옳고 그름을 명확히 먼저 외칠 줄 알았다. 하루는 회의에서 내가 실망스러운 태도를 많이 보였는데 차마 귀갓길에 이 동생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럼에도 남자 동기는 한결같이 내 어깨를 주무르며 오히려 상태를 걱정해 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을 것임에도. 그 짧은 귀갓길이 내겐 가장 큰 위로였다.
- 마침내 세상으로
4월, 거듭한 방향성 회의 끝에 드디어 첫 정식 프로덕트의 방향성을 구체화 했고, 내 두 번째 특명 역시 이 서비스를 구현하는 것이 되었다. 단, 이번에는 우수한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함께했다. 정식 개발 외주 단가를 맞출 여건이 안 되었던 우리에게 낮은 페이로 단기간 프로젝트 합류 의사를 표해준 두 명의 스페셜리스트는 너무 소중한 인연이었다. 최대한 타임라인을 앞당기기 위해 정기 회의 외에도 시도 때도 없이 모여 기획 회의를 했고, 디자이너도 무리한 마감 기한을 군말 없이 소화해 주었다. 개발은 처음에는 순항했으나 한 달여 시간이 흐르자 업데이트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매니징이 소홀했던 탓도 있지만, 기획이 시간이 지날수록 볼륨이 커지는 문제 또한 간과할 수 없었다. 이 또한 스타트업의 흔한 실수 중 하나로 첫 프로덕트를 너무 완벽하게, 모든 기능을 갖춘 채 내놓으려 한단 것이다. 시공간은 당장 이 프로덕트 하나에 목숨줄을 걸다시피 했고, 초기와 달리 자잘한 기능이 덕지덕지 계속 붙어 나가고 있었다.
내가 장담한 출시일조차 한 달 이상 지연되자 더 이상의 기획 변경은 금지했고, 출시에 제한되는 모든 요소를 과감히 배제했다. 푸시 알림과 인앱결제 기능을 구현하고서야 드디어 최종 접근성 점검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은 '스크린리더'라는 OS 내장 기능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스마트폰, PC 등의 전자기기를 이용한다. 스크린리더는 텍스트, 이미지, 버튼 등의 포커스된 컴포넌트 요소를 실시간 음성으로 안내해 주는 기능이다. 그러나 애플리케이션의 개발 단에서 스크린리더가 원활히 컴포넌트를 인식하고, 적절한 음성 안내를 하도록 후작업을 해주지 않는다면 시각장애인은 해당 앱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다. 이 외에도 쉬운 레이아웃 구성, 폰트 크기, 고대비 디자인 등 디지털 약자를 고려한 설계를 할 때 디지털 접근성을 갖추었다고 한다.
접근성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으면 시각장애인은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용이 불가한 상황에 이른다. 놀랍게도 이런 식으로 시각장애인이 접근하지 못하는 국내 웹, 앱 서비스가 압도적인 과반수 이상을 차지한다. 시공간에선 내부적으로 직접 스크린리더 환경에서 앱을 테스트하고 발생한 이슈를 공유하면 개발자분이 대응하는 식으로 점검이 이루어졌다. 단순히 스크린리더가 읽어줄 음성 텍스트를 컴포넌트에 라벨링 하는 것 외에도 포커스가 어떤 순서와 시나리오로 움직일 것인지 시각장애인의 유저 플로우를 고려해 구성하는 일은 꽤 까다롭다. 개발상 구현도 쉽지 않은데, 앱 개발 프레임워크 마다 제공하는 접근성 커스텀 로직이 사뭇 달라 의도한 대로 잘 작동하지 않는 경우도 정말 많다.
이슈를 거의 다 잡아낼 때쯤 양대 스토어에 애플리케이션 등록 심사를 신청했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통상적으로 구글 플레이스토어의 심사는 비교적 덜 까다롭고 리젝 확률이 높지 않다. 문제는 애플 앱스토어였는데, 특히 첫 심사의 경우 '정말 이렇게까지?' 싶을 정도로 심사 기준이 많고 깐깐하다. 일전에 만든 MVP 테스트용 앱의 경우 10번 가깝게 시도했지만 결국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고 포기했었다. 지금 심사받는 앱은 이보다도 더 기능이 많고 결제 기능까지 붙는지라 대체 얼마나 대응 기간이 소요될지 미지수였다. 앞선 경험처럼 이번에도 앱을 못 출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수시로 엄습했다. 지난 세 달간의 팀원들의 고생과 기대를 또 저버리게 된다는 두려움에.
여느 날처럼 회의를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PM과 난 두 정거장만큼 귀갓길이 겹치는데, 그 5분 남짓한 순간에 휴대전화에 처음 보는 알림이 떴다. 이내 그것이 앱스토어 배포 승인 알림임을 깨달았고, PM은 내가 속을 앓고 있던 것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본인이 기뻐하기보다 내 반응을 살피며 내가 안도하는 것을 더 같이 공감해 주었다. 그렇게 시공간은 8월 초, 양대 마켓에 비로소 첫 정식 서비스 '시각장애인의 편리한 쇼핑을 돕는 앱, 픽포미'를 출시하게 된다.
2. 포화 (飽和)
- 두려울 게 없는
픽포미 개발을 둘러싼 4개월의 기간 동안 시공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좋은 일로는 최대 규모 정부 지원사업인 예비창업패키지에 소셜벤처 트랙으로 선정되어 여유로운 사업자금이 확보되었다는 점, 의외인 일로는 내가 서류상 대표로 협약을 진행하게 되었다는 점 정도다. 당시엔 그 선택이 2년간 나를 강제로 시공간에 묶어둘 명분이 될 줄은 몰랐으나, 책임을 더 이상 회피하고 싶지 않았기에 내가 먼저 의사를 표했다. 모든 팀원이 달려들어 같이 발표 자료를 만들고 PM은 없는 시간까지 짜내어 내 발표 연습을 따로 도와주었다. 공교롭게도 발표 심사일이 내 생일이었고, 그다음 날 신입 팀원이 내 서프라이즈 생일 케이크를 든 채 첫 회의에 참석하였다.
픽포미 개발이 마무리되어 갈 때 즈음에도 난 픽포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그 성공 가능성이란 단순히 출시 직후 시장의 반응과는 별개로, 앞으로 원활한 유저 피드백을 거쳐 바람직한 방향으로 확장, 고도화되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늠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픽포미는 내가 그리는 이상적 도달점과의 당장의 괴리가 너무 컸다. 기획, 개발, 기술적으로도 갈 길이 너무 멀어 보였다. 이런 미연의 불안을 안고 있던 나는 5월 말 즘부터 추가적인 BM을 계속 모색해 갈 것을 팀에 제안했다. 어차피 픽포미 개발 진행 상황의 팔로업은 많은 인력을 요구하지 않기에, 지금 미리 plan B를 만들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굵직한 아이디어들이 정련되어 갈 때 즘 방학이 다가왔고, BM 확장을 대비해 새로이 스페셜리스트 모집을 진행했다. 내세울 것 없이 애절했던 3월의 모집 때보다는 더 기대감을 갖고 리크루팅 홍보를 진행했는데, 이에 부응하듯 다수의 지원서를 받아낼 수 있었다. 면접 및 선발은 새로이 선출된 2대 PM과 내가 전담하였고, 들뜬 마음으로 지원한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대면했다. 지원자는 보통 큰 프로젝트 협업 경험과 양질의 포트폴리오를 원하는 취준생들이 대부분인데,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시공간의 비전에 동감하여 지원해 주시는 감사한 분들도 참 많았다.
마지막 지원자와의 커피챗이 마무리될 때 즈음 머릿속에는 이미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설득이란 것도 없이 그 방에 있던 화이트보드에 신나게 적어가며 신임 PM과 난 더 정교한 그림을 완성하는 데 이르렀다. 이렇게 완성된 그림이란 지원한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전부 합격시키고, 기존 픽포미에 더해 새로운 2개의 하위 프로젝트를 신설하여 각각에 인원을 분산 배치시키는, 이른바 시공간 3 프로덕트 체재의 시작이었다. 기존 시공간 내부 팀원이 각 프로덕트의 PO를 맡아 총괄 PM의 권한과 부담을 분산하고, 팀원은 소속된 프로젝트에 더 집중할 여건을 만들어 줌으로써 생산성과 효율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전에 TF의 형식으로 유지되던 분업 구조를 완전히 정립한 계기가 된 것이다.
이로써 시공간은 일시적이지만 7명의 내부 팀원과 11명의 스페셜리스트를 더해 한순간에 18명의 조직이 되었다. 분명 이만한 외부 인력을 제대로 매니징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컸음에도 주저 없이 이 길을 택했던 것은 단연 신임 PM의 수완을 100% 믿었기 때문이었다. 신임 PM은 나보다 어렸지만 일 처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합리적이었고, 무엇보다 HR을 포함한 그 어떤 난감한 문제도 차근차근 현명히 풀어나가는 능력을 갖췄었다. 다른 팀원들 또한 전부 나보다 우수한 잠재력을 지닌 인재들이었기에 난 그야말로 두려울 것 없이 어떤 도전이든 시작할 자신이 있었다.
- 과냉각
7월, 시공간에 또 한 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시공간이 시각장애인 시장에서 막 이름을 알리는 신입생이라면 반대로 VC 업계에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각장애 스타트업이 하나 있다(이하 '스타트업 W'). 우리보다 5년 이상 앞서 시각장애 섹터에서 활동해 왔고 메인으로 운영하던 앱 서비스는 시각장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다. 우연하게도 'W'의 CSO가 내 지인의 친구분인 덕에 일찍이 몇 번의 만남을 가져 값진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W'에서 우리에게 먼저 연락을 취해와 시공간과의 정식 미팅이 이루어졌는데, 상대측에서 제안한 내용인즉 해당 앱 서비스와 관련하여 시공간과 꽤 큰 규모의 협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적잖은 인풋이 예상되었으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너무 컸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8월 중순, 시공간의 파운더 2명이 1년의 인액터스 활동 기한을 채우고 팀을 떠났다. 1년마다 팀원이 떠나고 수시로 신입 기수의 팀원을 보충받는 인액터스 프로젝트의 구조는 통상적인 스타트업의 관점으로 본다면 매우 기형적이다. 고정된 대표 없이 멤버가 수시로 바뀌어 팀의 비전과 기조가 퇴색되기 쉽고 모멘텀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이 단점으로 작용하지만, 대신 그 1년간 모든 걸 쏟아붓게 하고 뒤이어 새 피를 수혈받는 인력 공급 방식은 내가 보기에 큰 장점이었다. 다만, 시공간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던 파운더 2명의 굿바이는 큰 타격이었다. 20명의 큰 조직이 된 지금에 비해, 시공간의 처음은 오직 그 둘이 내 기수가 합류하기까지의 힘든 3개월을 버텨내야 했다. 누구보다 프로젝트에 애정이 있을 두 명이 미련 없이 팀을 떠나는 것은 결국 남은 멤버들에 대한 더 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호기롭게 시작한 3 프로덕트 체재는 초반에 꽤 성공적인 듯 보였다. 각 하위 프로젝트의 PO가 주도적으로 개별 회의를 열어 프로젝트를 착실히 리드해갔다. 그러나 분업화했다 한들 전체적인 프로젝트 규모가 갑자기 커진 것은 사실이었기에, 팀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특히, 전체 프로젝트를 매니징하는 PM과 각 프로덕트의 개발 상황을 총괄하는 내 부담이 더 불어날 수 밖에 없었다. 'W'와의 협업 프로젝트 건까지, 10명에 가까운 개발자와 각종 개발 이슈에 대해 소통해야 했고, 2명의 AI 엔지니어와의 리서치 미팅까지 리드해야 했다. 못해도 한 주에 5~6개의 온/오프라인 내부 업무 미팅이 잡혔는데, PM은 당연하다는 듯 나와 같이 그 모든 미팅에 참석했다. 감히 말하건대, 당시 모든 팀원들이 정말 목숨을 걸다시피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열심히 달려온 결실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픽포미'의 출시 소식은 성공적으로 언론에 다수 보도되었고, 10월에 뒤이어 새로이 출시한 '봄자국' 서비스 또한 시공간의 입지를 다져주었다. 조금 늦게 소개하지만, 시공간이 아주 초기부터 타 단체와 협업해 개발해 온 장애 인권 교육용 보드게임 '배프마을' 또한 거의 1년 만에 첫 펀딩을 개시할 수 있었다. 그즈음 겨우 한숨 돌릴 틈이 있었으나 이내 또 다른 문제가 터졌는데, 바로 'W'와의 협업 프로젝트를 전담하던 우리 측 개발자분이 개인 사정으로 일을 중단하게 된 것이다. 겨우 다른 개발자 한 분을 해당 프로젝트로 임시 배정하였으나 이분마저도 프로젝트를 끝까지 책임지지는 못하였다. 마감일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탓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고, 결국 내가 뒤이어 개발을 직접 마무리 짓게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FE 프레임워크에 코드 베이스를 처음부터 파악해야 했고 하필 남은 기능이 결제 모듈 쪽이라 크게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게 한 달여간 학업마저 제쳐놓고 밤낮없이 코드를 짜는 외로운 분투가 이어졌는데, 마감일을 넘겨 하루하루 협업사 측의 눈치를 보며 정신적 압박이 누적되는 것이 제일의 고통이었다. 이때쯤 내 정신적 피로가 정말 한계에 다다랐다는 감각이 생생히 느껴졌다. 물은 대기압보다 더 강한 압력이 가해질 때 어는점이 낮아진다. 생수병 속 물이 영하의 온도에서 얼지 않다 뚜껑을 여는 순간 기압이 낮아져 급격히 응고하는 것이 그 원리다. 나 또한 이미 어는점을 한참 넘겼음에도 나를 둘러싼 압력 덕분에 얼지 않고 버틸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압력이 되어준 것은 책임감과 곧 끝난다는 기대감, 그리고 무엇보다 팀원들의 한결같은 응원이었을 것이다.
- 두 번째 선택
나의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동안 시공간에도 다시금 변화가 있었다. 9월에 두 명, 10월에 한 명의 신입 멤버가 합류했으며, 11월 경 그 중 한 명이 새로운 PM으로 선출됐다. 3대 PM은 첫 합류 때 시공간의 강도 높은 업무에 적응이 조금 더뎠으나, 부족한 역량을 키우기 위해 본인이 누구보다도 주저 없이 더 노력했다.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하면서까지 업무 요령에 관해 물어봤고, 곧 다른 팀원들에게도 저마다 수시로 조언을 구했음을 알게 된 이후 신임 PM의 역량에 대해 두 번 다시 걱정 삼지 않았다. 다른 두 신입 멤버는 둘 다 나보다 선배였고 실무 경험이 많아 빠르게 팀에 적응하였다. 두 명의 풍부한 경험과 인사이트를 통해 시공간이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
정신없던 11월이 지나 어느새 인액터스에서의 마지막 활동 달인 12월이 되었다. 프로젝트를 디벨롭하는 업무량을 줄이고 내 나름의 관점에서 각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데 집중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발자취엔 막무가내로 널브러진 개발 업무 체계가 있었고, 분명 내가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머잖아 시공간에 독이 될 기술 부채였다. 그러나 내 뒤를 이을 내부 개발자가 언제 나타나 줄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과연 내가 어떤 형태의 인수인계를 준비해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게 되었다.
형식적으로 후임 개발 PM을 팀원 중 선정하긴 했으나, 비전공자가 파악할 수 있는 개발 업무 범위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었다. 시공간 내부 팀원과 외부 개발자 간 소통 갭이 이렇게 커져 있던 것은 내 존재 탓이 컸다. 좋게 말하면 내가 중간 다리가 되어주고 서비스 배포 및 각종 개발 리소스 관리를 전담했던 한 편, 뒤집어 말해 내가 빠지면 이 업무를 외부 개발자 및 비전공자 내부 팀원 어느 한쪽도 부담하기 애매해지는 것이다. 특별히 더 신뢰를 쌓아갔던 개발자분 또한 개인 사정상 팀과 더 함께하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일시적인 활동 연장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두 달, 겨울방학까지의 유예가 있다면 나도 인수인계 부담을 줄일 수 있고, 팀에 있어서도 세 명의 핵심 멤버 이탈에 대한 충격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러한 의중을 일찌감치 눈치챈 동기 팀원들은 큰 우려를 표했다. 나 혼자 남아있다는 데 미안함과 걱정, 무엇보다 행여 내가 이대로 제대로 손을 털지 못하고 되레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에 대한 우려였다. 특히 전 PM이었던 동기 팀원이 극구 만류한 덕분에 정식 활동 연장이라는 선택지는 제외할 수 있었다. 대신, 회의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서면으로 업무 소통을 이어간다는 조건으로 방학 때까지 일을 조금 돕는다는데 허락을 구할 수 있었다.
이윽고 학회의 정식 활동 마지막 날, 인액터스 마무리 소감을 전체 학회원 앞에서 밝히는 자리가 찾아왔다. 단상에 나가자 시공간 팀원들은 이미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 역시 이미 연장을 선택했음에도 묘한 감정이 들었다. 전하고픈 말을 혹여 빼먹을까 나답잖게 대본까지 휴대전화에 적어왔었다.
'... 지난 이 1년이 제겐 정말 꿈과 같은 시간이었고, 긴 여정이자 여행이었습니다.
한때 시공간을 크게 성공시켜 여러분들과의 여정을 더 먼 곳으로 가져가는 그림을 그리곤 하였으나,
제 역량이 부족하여 이 여정을 여기서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1년을 회고해 보았을 때, 나 자신을 정말 매섭게 몰아붙이며 학업과 건강보다도 시공간을 우선하도록 만들었던 것은 결국 틈새 같던 희망과 이상이었다. 당장의 힘듦과 고됨을 이기고 나면 언젠가 볕이 드리라 진심으로 믿어왔다. 그리고 그 꿈을 꿀 수 있었던, 꾸게 했던 이들이 바로 시공간 팀원들, 특히 1년의 세월을 온전히 함께한 두 명의 동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내 판단에 그 빛이 쬐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고 이대로 동기들과의 여정을 마무리해야 했다. 문득 그 아쉬움과 미안함에 눈물이 났으나 애써 삼키고 스피치를 마무리해 갔다.
'... 1년 전 이 자리에서 처음 만나 온갖 산전수전을 헤치며 서로에 의지하고, 서로를 믿고, 서로에 기대었던 제 동기들.
지금 이 자리에 다시 모여 웃는 얼굴로 그간의 긴 여정을 함께 마무리할 수 있음에 저는 감사합니다.
인연은 때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꽃 피우곤 합니다.
모두가 올곧고 선한 동기로부터 한 날 이곳에 모였기에, 언젠가 다시 더 좋은 인연으로 만날 것을 확신하며,
1년간의 여정을 여기서 미련 없이 마무리합니다.'
당시 시공간 팀원들은 모두 주에 20시간이 넘는 업무 일지를 작성했고, 1년간 최소 천시간이 넘는 일을 하고 팀을 떠났다. 그만한 청춘들의 시간이 전부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최소한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시공간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한 팀, 한뜻으로 달려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3. 표류
- 책임과 욕심
활동이 공식적으로 종료된 이후 소속 학과 모 연구실에 예정된 인턴 활동을 시작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출퇴근이 자유롭고 연구 활동에 자유도를 많이 주어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랩 인턴에 적응할 무렵 내 눈에 다시 시공간 일이 밟히기 시작했다. 아직 내가 깊이 관여된 업무가 너무 많았다. 각종 개발 업무부터 예비창업패키지 성과 발표 준비를 포함한 사업자 대표 행정 업무까지. 그러나 이전과 달리 태스크에 마감 기한이 지정되지 않고, 회의에 참석할 것 없이 내 페이스대로 업무를 볼 수 있으니 전보다는 마음이 훨씬 편했다. 그렇게 낮에는 학교로 출근해 인턴 활동을 하고 퇴근 후 밤에는 시공간 업무를 보았다.
인턴 때문에 매일 학교로 출근하다 보니 가끔 퇴근 시간대에 맞추어 회의가 끝난 시공간 팀원들과 밥을 먹곤 했다. 7명에서 4명이 된 시공간은 텅 비어 보였으나, 이내 곧 합류한 두 명의 신입 멤버 덕에 다시 활기가 도는 듯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남은 팀원들은 내 기수의 굿바이 후 시공간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며, 개인적으로 저마다 걱정을 토로하곤 했다. 굳건히 시공간의 방향성을 비추어주던 기존 멤버들의 이탈은 남은 멤버들에게 생각보다 큰 심리적 부담과 혼란으로 다가왔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숙제에 내가 직접 관여하는 것은 옳지 않았고 그저 뒤에서 응원과 믿음을 주는 수밖에 없었다. 시공간에 언젠가 광명이 찾아올 것이라고, 나를 믿고 이번까지만 도전해 보자고 했다. 이는 절대 빈말이 아니었다.
방학 동안 나 나름대로 열정을 다해 시공간을 도왔다. 기술적 이해가 필요한 외부 미팅, 스페셜리스트 커피챗, 인터뷰 등에 같이 참여했으며, 개발자 소통에 이슈가 생기면 뒤를 봐줬다. 한 번 부탁을 받아 도움을 주면 더 큰 문제가 보이고,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내 성격 탓에 더 깊이 관여하는 일이 잦게 되었다. 팀원들은 어쩔 수 없이 부탁을 해오면서도 매번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난 팀원들이 내 눈치를 볼 바에는 뻔뻔하게 날 이용하여 프로젝트를 빨리 안정적인 궤도에 올려놓길 바랐다. 따라서 내게 전혀 미안해할 필요 없으며,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 없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이것을 단순한 책임감으로 치부해도 되는지, 그저 이대로 시공간을 놓을 수 없던 욕심이었는지 나조차도 헷갈렸다.
1월 중 예비창업패키지 최종 사업 평가 발표가 진행되었다. 예비창업패키지는 막대한 사업비를 지원해 주는 만큼 서류 및 행정 처리가 매우 까다로웠다. 각종 사업자 세금, 계약 서류와 관련 회계 처리 또한 내가 전담해 왔는데 처음에는 정말 골머리를 많이 앓았다. 사업비를 전부 집행 처리하기 위해 12월 31일에도 단 한 시도 쉬지 못했다. 최종 평가 발표를 앞두고도 그동안 시공간이 1년간 걸어온 발자취를 과연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심한 경우 협약 불성실 이행으로 자금 회수 처리를 당할 수도 있었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3월에 고지된 사업 평가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최우수(10%)'였다. 기쁨보단 깊은 안도를 느끼며 대표를 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던 1년 전, 그때 각오한 책임을 다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시공간 팀원들뿐만 아니라 시공간을 거쳐 간 수많은 디자이너, 개발자분들의 공도 너무 컸다. 모든 스페셜리스트분이 정말 한 팀처럼 소통하고 받은 것 이상으로 기여해주셨기에 지금의 시공간이 있었다. 시공간은 분명 나로 대표되는 것이 아닌, 같은 뜻을 가진 수많은 개인이 저마다 쌓아 올린 탑이었다. 이들의 노력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는 안도가 더 컸을 것이다.
- 믿음과 결과
2월경, 한 하위 프로젝트가 모종의 이슈로 특히 진척이 늦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해당 PO와 내가 같이 달려들어 어떻든 타임라인을 끌어올리려 고군분투했다. 그 프로젝트는 어떻게 보면 아주 초기 진행했던 MVP 테스트 서비스의 기조를 그대로 이어받아 온 것으로, 몇 번의 큰 리뉴얼을 거쳐 마침내 최종 서비스 기획의 개발 구현을 앞두고 있었다. 예상보다 타임라인이 너무 늦어지자 PO는 PMF를 더 빠르게 검증하기 위한 별도의 프로토타이핑을 제안했다. 그러나 당장 끌어올 수 있는 개발 리소스가 없었기에 팀원들이 직접 수기로 진행하려는 상황에 이르자 보다 못한 내가 또 자진하여 나서게 되었다. 그렇게 약 3주간 PO와의 긴밀한 합작 끝에 정말 가볍되 뾰족한 기능을 가진 애플리케이션, '누구나 들을 수 있는 나만의 앨범, 소리앨범'이 빠르게 탄생하였다.
소리앨범 개발이 속전속결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간 축적된 시각장애인에 대한 인사이트와 빠르게 발전한 AI 기술 덕분이었다. GPT를 필두로 한 LLM이 마침내 이미지 입력까지 처리가능한, LMM(Large Multimodal Model)으로 확장되자 지금까지와 달리 인력의 소모 없이 온전히 AI만으로 작동하는 갤러리 앱, 소리앨범을 구상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앱에 사진을 업로드하면 AI가 상세한 묘사를 생성해 낼 뿐인, 굉장히 미니멀한 기능의 서비스였으나 기획단부터 개발, 접근성 작업까지 그간 쌓은 모든 노하우를 전부 들이부어 시각장애인의 사용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토록 했다. 기술은 그 자체만으로 독립하거나 당장 가치를 창출하기 어렵다. 역시 누군가 부단히 노력하여 '가치'를 주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 내가 1년간 배운 점이었다.
소리앨범이 빠르게 시각장애인 유저를 확보하고 기대 이상의 반응을 이끌어내자 입지가 커졌지만, 개발 타임라인이 계속 늦어지던 프로젝트, '브로디'의 입지는 빠르게 줄어들게 되었다. 시공간의 첫 MVP 테스트, '시각장애인이 업로드한 사진을 정안인이 설명해 준다'는 서비스를 앱테크의 관점에서 새로이 기획해 낸 것이 '봄자국', 그리고 이를 리뉴얼한 것이 브로디이다. 즉, 브로디는 초대 PM이 시공간을 만드는 계기가 된 서비스이자, 여러 번의 드랍과 리뉴얼을 거치며 시공간의 가장 많은 손길이 닿은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역사가 깊은 만큼 모두가 브로디의 한계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고, 완성까지도 기약이 없던 찰나 소리앨범이라는 매력적인 대안이 등장한 것이다. 별개로, 난 브로디의 긴 여정에 제대로 마침표를 찍고 싶었기에 PO를 도와 개발이 끝까지 무사히 완수되도록 노력했다.
시간이 흘러 4월 말, 마침내 브로디가 스토어 심사를 통과했다. 그동안 이 순간을 위해 뛰어왔던 시간이 빠르게 스쳐 갔다. 초대 PM이 내게 이 서비스를 설명해 준 순간부터 3번의 리뉴얼을 거치며 협업했던 10명이 넘는 디자이너와 개발자들까지.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같이 포기하지 않았던 PO에게 너무 감사했고, 처음으로 출시 버튼을 누르는 일을 양보했다. 별개로, 팀에서는 결국 브로디의 운영을 최소화하고 소리앨범으로의 투자를 선택했다. AI뿐만 아니라 인력에 많이 의존하는 브로디는 퀄리티 컨트롤 측면에서도, 리스크 매니징 차원에서도 소리앨범에 비해 한계가 명확했다. 이러한 결정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라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에도 큰 동요는 하지 않았다. 믿음은 항상 그만한 결과를 당장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다른 형태로든 그 모습을 보인다고 믿으며 어쩔 수 없이 남는 아쉬움을 삼켰다.
- 종착지
내게 남은 마지막 숙제는 픽포미였다. 픽포미는 첫 MVP 테스트 내용에 '쇼핑'의 도메인을 입혀 탄생한 방향성으로, 작년 8월 첫 출시 후 시공간 내 최장수 서비스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브로디' 보다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우직하게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거치며 유저와 데이터를 꾸준히 축적해 온 서비스이다. 서비스 내용은 간단하다. 픽포미 앱 내/외부에서 검색된 상품 정보에 대한 질문을 AI 혹은 사람 매니저가 상세 답변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AI 정확도가 충분치 않아 사람에 크게 의존하는 서비스였고, 얻는 수익에 비해 팀의 부담이 너무 컸다. 무엇보다 픽포미 PO의 의지였다. 올해 초까지도 픽포미에 꽤 많은 업데이트가 있었고 실제로 유의미하게 지표가 발전했으나 PO는 이것만으로는 아직 시각장애인이 '진짜 사용할 만한' 서비스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확히는, '우리가 자진해서 사용할 정도'가 되어야 시각장애인도 이용할 것이라 했다.
브로디의 한계를 소리앨범이 돌파했듯 픽포미도 과감한 돌파와 탈바꿈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이를 위한 기반은 이미 마련돼있었는데 역시 생성형 AI의 눈부신 발전이 핵심이었다. 정확도와 속도의 비약적인 발전, 그리고 무엇보다 비용이 많이 감소하면서 작년에는 절대 닿을 수 없어 보였던 목표가 점점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내 의견까지 반영된 채 4월부터 기획 구체화를 거쳐 5월부터 본격적인 리뉴얼 작업이 시작되었다. 긍정적인 것은 PO와 긴밀한 소통을 거치며 나조차도 예상 못 했던 기대 이상의 성능 개선을 달성할 수 있었단 점이고, 악재로는 그동안 픽포미를 전담하시던 개발자분이 팀을 갑작스레 떠나게 된 점이다. 덕분에 이번에도 마무리는 내가 직접 짓게 되었고 약 2개월이 소요된 후에야 비로소 대규모 업데이트를 일단락지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2개월은 소리앨범 개발 때보다도 작업량이 고되었으나 정말 시공간에서의 마지막 발자취라는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매진했다. 지난 1년간 계속 구현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던 기능들, 때문에 상상으로만 그려왔던 픽포미의 모습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보다 발전된 형태로 구현했다. 이렇게 작년 4월부터 이어진 픽포미와의 씨름에 직접 나름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것 또한 큰 행운이었다. 같이 밤낮없이 달려온 PO 또한 처음부터 오랫동안 픽포미를 담당해 왔으며 활동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기에 같이 결승선에 무사히 들어올 수 있음에 감사했다. PO는 마지막으로 직접 확인한 픽포미의 모습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남은 것은 뒤를 이을 팀원들을 믿는 것 뿐이었다. 여기까지 달려오니 어느 새 시간은 흘러 8월이 되었고, 문득 정말 종착점에 곧 도착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4. 결말
- 근황
올해 시공간의 그늘 속에서 내가 개발에만 매진하는 동안 팀은 착실히, 차근차근 성과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4월 경 새로 선출된 4대 PM은 나보다 3살이나 어릴 정도로 최연소였지만, 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익히 그 칭찬을 전해 들었었다. 곧 나와도 업무적으로 소통할 일이 점점 잦아졌는데, 역시나 소문대로의 실행력과 일 처리 수완을 갖추고 있었다. 내게 과하게 편중된 개발 업무 시스템의 문제점을 빠르게 인지하고 개발 인력 확충에 힘쓰면서도, 적극적으로 기회를 포착하고 강단 있게 추진하는 팀 운영으로 시공간의 성과를 쌓아나갔다. 최근 합류한 두 명의 신입 멤버도 아무 탈 없이 훌륭히 제 역할을 해주고 있단 소식을 전해들었고, 덕분에 시공간을 믿고 떠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어주었다.
7월 말, 초대 PM의 의지로 시공간 전체 멤버 회식을 갖게 되었다. 내가 아는 한 초대 PM은 누구보다 시공간에 애착이 있고, 그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다만, 굿바이 이후 취업 준비 및 바쁜 직장생활로 시공간에 대한 교류가 줄어든 채 1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본인 또한 이를 매우 아쉬워하고 있었다. 다른 알럼나이들도 두말할 것 없이 나보다도 시공간에 대한 관심과 걱정이 클 터였다. 이러한 동기로부터 전체 멤버가 교류할 자리를 만들고 싶었고 현재 활동 중인 멤버들도 알럼들의 응원과 관심을 느낄 수 있길 바랐다. 당시 활동 중인 PM과 멤버들이 바쁜데도 흔쾌히 참여 의사를 밝혀준 덕에 마침내 알럼나이 7명, 액팅 6명이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다. 액팅 멤버로부터 그간의 밀린 소식들을 듣는 동시에 알럼나이들의 시시콜콜한 옛이야기도 어우러졌다. 시공간에서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시공간 멤버들 뿐이고, 진정으로 공감과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것 역시 우리들이었다.
8월 중순, 나와 정식으로 같이 활동했던 마지막 기수 멤버 두 명이 마침내 1년의 활동 임기를 채우고 굿바이를 맞게 되었다. 나와 함께 활동한 기간은 작년 4개월 남짓이지만, 실질적으로 올해까지 약 1년간 합을 맞춰왔던 소중한 동료들이었다. 우스갯소리로 그 두 명이 팀을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내기하곤 했는데 막상 그 순간은 순식간에 닥쳐왔다. 시공간에 빛이 쬐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이 둘이 그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숱하게 말해왔다. 그 빛을 조금이나마 느꼈을지, 아니면 나처럼 그 믿음을 남은 팀원들에게 용기로 이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 만약에
흔히 스타트업에서 회고라 함은 이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며, 잘잘못을 가리고 개선점을 찾는 일을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눈치챘겠지만 난 과거의 선택이나 팀의 행적에 대해 일절의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이전의 회고 글들에서는 개인적인 후회나 아쉬움을 같이 기록해 뒀던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20개월의 시공간 활동에 있어 순간의 후회나 자책이 없었냐고 묻는 것은 우문이다. 난 말 그대로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의 나를 자책하는 매일을 보내왔다. 이러한 자책은 한 때 눈덩이처럼 켜져 급기야 날 직접 프로젝트에 선발했던 초대 PM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프로젝트에 합류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잘됐을 수도 있었을 거야"
이 말은 오랜 고민에서 나온 진심이었다. 반쪽짜리 실력을 갖춘 내가 시공간의 발목을 잡을 바에야 처음부터 실력 있는 외부 개발자에 의존하는 게 더 나은 길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말을 들을 때 마다 PM은 멋쩍게 흘려넘기는 듯하더니, 시간이 흘러 본인이 팀을 떠나는 날 내게 쓴 편지에 그 답을 적어놓았다.
'네가 가끔 나에게 네가 다른 프로젝트에 가는 '만약'을 이야기하길래, 나도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하면 깔끔한 것 같아. 나는 지금의 시공간이 100% 마음에 들고, 그래서 이 시공간을 만든 모든 의사결정에 감사하고,
그래서 너의 존재 자체에 감사하고 있다고.
... 네가 없는 시공간은 내가 좋아하는 시공간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는 비단 나에게만 향하는 말이 아니다. 나 또한 지금의 시공간과 사람들이 온전히 좋고, 이 이상의 좋음을 감히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거쳐온, 모든 팀원들이 각기 이루어온 시공간의 발자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기에 시공간에서는 그 누구도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신과 팀원들을 믿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
- 끝맺으며
이 글을 작성하며 지난 시간을 찬찬히 되짚으니 꽤 먼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나조차도 시공간에서의 여정이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시공간 활동을 시작할 적에 주위로부터 많은 우려와 의문을 많이 받았었다. '공대생이 왜 하필 인액터스냐', '다른 팀원들은 하는 게 뭐냐' 따위의 말은 정말 지겹게 들었고, 최근에는 아직도 그걸 하고 있냐는 말을 듣는다. 심지어 어머니로부터도. 시공간을 하며 학점은 바닥을 치고, 땡전 한 푼 벌어가지도 못하며, 내 진로에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는 채 일했다. 그럼에도 난 내 인생에서 시공간이란 선택을 후회할 생각이 없다. 누가 뭐래도 난 시공간이 좋다.
막상 회고를 마무리 지으려 하니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다. 여기서 멈춰 서는 것은 나뿐이고, 시공간은 앞으로도 계속 달려 나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준 지난 팀원들에게, 계속 달려나갈 앞으로의 팀원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 회고록은 내 지난 20개월에 대한 기록이자 이정표이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이 글을 읽었을 때 내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자못 궁금한데, 그때가 올 때 까지 다음 장으로 넘어가 새롭게 출발해 달려 나갈 뿐이다.
시공간 회고록 - '일대기 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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